그는 대관령의 폭설을 기록하는 여행자다. 그런데 그가 지나간 곳에는 발자국이 없다. 허공을 지우는 안개와 눈발, 바람, 그리고 허리까지 쌓인 눈은 눈의 여행자마저 지워버린다. 가끔 동쪽으로 심하게 구부러진 나무 한 그루 나타났다가 사라진다. 눈 속에 허리를 파묻은 나무 한 그루 꿈처럼 떠올랐다가 그마저 자취를 감춘다. 아아, 그러나 어느 찰나 눈을 덮은 안개는 홀연히 사라지고 아주 먼 곳으로 걸어간 듯한 발자국들이 웅성거리기도 한다. 온몸으로 폭설을 짊어진, 등이 구부러진 미륵 같은 소나무. 지독한 눈과 바람에 생의 한쪽을 기꺼이 희생한 이깔나무, 전나무 들. 그 모든 게 정지한 밤의 시리도록 얼얼한 고요까지 그는 오래 바라본다. 계속 바라볼 것이다.
봄이 오고 작은 꽃 한 송이 피어날 때까지.
김도연 - 강원도 평창, 소설가
작가노트
어린시절을 보낸 겨울 봉평은 영혼 속에서도 눈雪이 내렸습니다. 늦은 아침을 먹고 눈을 치다 돌아서면 집까지의 길이 눈에 묻혀 다시 눈을 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. 눈은 하염없는 것이자 세상과의 통화를 단절하는 것이고 이 지상의 불편과 음모를 다 가리는 것이었습니다. 그 봉평을 떠나 대관령을 넘으며 저는 앞대로 왔습니다. 가끔 해무가 일거나 바람이 몹시 심하면 그 봉평의 유년이 생각납니다. 산맥의 공제선을 지우고 하염없이 내리던 눈. 그럴 때마다 저는 대관령에 올랐습니다. 어김없이 그곳에서 저는 눈을 만났고 제 흐린 전망의 탈출구를 모색했습니다. 흔적 없는 눈밭에 길을 내며 제 삶처럼 혼자서 그 눈보라를 다 맞는 나무들을 오래 바라봤습니다. 누구에게나 삶은 그럴 것이란 걸 이제 조금 배웠습니다. 그 배움의 그림자들을 여기 내어 놓습니다. 대관령에서 문득 만나는 폭설처럼 혹은 안개처럼 생이 다가오더라도 그것들이 모두 설렘이 되길 빕니다.